2009년 11월 26일 목요일

동문 서답!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2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27.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2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29.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30. 예수께서 응답하여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 두고 갔다.







31.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2.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서,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3.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34.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다음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그가 대답하였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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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은 아주 많이 다뤄졌고 다양한 설교들로 홍수를 이루었고, 목사님들의 단골 본문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이 본문을 통해서 다루는 주재라면 가장 큰 계명, 혹은 이웃 사랑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율법의 절대강령이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웃이 누구냐이며 이웃을 도와주는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할 일이며 교회가 마땅히 행하여야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선행과 구제와 봉사를 실천하자고 강조합니다.



저도 참 많이 이 본문을 접하게 되었는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떠오르는 감동이 있어서 잠간 나누기를 원합니다.

제목을 동문서답이라 하였습니다.^^



어찌 본다면, 여기 본문에 등장하는 한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의 대답이 율법사의 기대와 다르게 진행이 되었기에 그렇게 정하였습니다. 우리의 기대와 원함과 하나님의 기대와 원함이 얼마나 다르며 거리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께 질문한 사람이 율법 교사입니다.

쉽게 표현 한다면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밥 먹고 사는 율법 전문가라는 말입니다.

조금 현대적으로 비약을 시켜보면 아마도 '구약 신학자' 정도일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말하자면 전문가요 선생소릴 듣는자입니다.



아쉬울 것도 없고 부러울것이 없으며 대접이나 받았지 자기 위에 누구를 향하여서 선생이라 부를 사람이 없는 신분이라는 말입니다. 자기보다 연상이거나 항렬이 높은 대 선배가 아니라면 선생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율법 교사가 지금 예수께 선생이라 부르면서 질문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질문하는 의도가 무엇인가를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시험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뭔가를 가르침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시험'하려는 것입니다.



시험한다는 것은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안다는 자신감이 없으면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시험하려는 마음이 있는다는 것은 곧,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사단이 예수를 광야에서 시험한것이 교만입니다.



내가 혹시 누군가를 의식해서 시험해 보려는 마음이 있다면 조심하십시오^^

이미 교만함을 사단이 던졌다는 신호로 생각하시고 빨리 버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자를 가까이 하십니다.



이 율법 교사는 예수를 곤경에 처하게 하려는 검은 마음으로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영생에 대하여 관심 없습니다.



나사렛에서 어느날 나타난 예수라는 젊은 청년이 새로운 바람을 몰고 등장하는것에

반감을 들고 나온 자입니다. 어쩌면 율법사들의 선발대로 뽑히지는 않았을런지...

이 사람은 율법으로 먹고사는 자이기에 오로지 율법밖에는 없는자입니다.

그런 자가 예수께 시험하고자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 질문을 한것입니다.

영생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이렇게 무지한 질문을 하는것입니다. 사실은 영생에 대하여 관심없는 종교전문가일 뿐입니다. 다만 예수를 시험해서 사람들에게 예수가 사이비요 이단이라는것을 선전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밥그릇을 침범하는 경쟁의 상대로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수의 행보를 그동안 보니까 안식일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율법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자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회당에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하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분명 율법을 어기고 무시하는 자로 보인것입니다만 사람들이 많이 예수를 따라다니니 뭔가 대책을 세워야할 판인 것입니다.



율법 교사가 가장 자신있는 것이 율법입니다. 전공이 율법이니까요.

그러니 영생이 목적이 아니라 율법으로 한 수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뭔가 전문가라고 자처하시는 분들이 빠지기 쉬운 부분들입니다. 자기가 알고 익숙하고 자신 있는 것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입니다. 영생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께 율법에 대하여 강의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가 무엇을 목적하는가를 훤히 아시기에 이렇게 응수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율법교사는 속으로 얼마나 쾌제를 하였는지 안봐도 보입니다. 드디어 걸렸다고 좋아했을 것입니다. 아주 반색을 하면서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이제 개임은 끊났다는 것입니다. 아주 막힘도 없이 술술 자연스럽게 모범 정답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진정으로 영생에 대하여 갈급함과 소원함이 있었다면?

예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야 하지 않았을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모른다는게 정확한 것입니다.

볼수 있다고 하는 자는 소경이며 못 본다고 하는 자들이 보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모르는 저를 용서하여 주소서 하는것이 진정입니다.



같은 본문을 마태는 다르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9장16절 이하에 한 부자 청년이며 관원이 등장합니다.



이 청년이 예수께 달려와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었을 때,

처음에는 계명을 지켰는가 라고 하십니다.

오늘 율법 교사와 부자 청년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율법 교사는 예수를 시험코자 율법을 이용한 것이었고,

부자 청년은 율법을 그동안 다 지켰다는 자기 의가 강하였다는 것의 차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시험하려는 것은 없었고 다만 인정을 받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을 지켰는가 묻자 어려서 부터 지켰다고 힘주어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청년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청년에게는 율법 지킴보다 더 중여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재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재산을 다 팔아서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나서 예수를 따라오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재물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어야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재물이 많은것 때문에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 청년이 원했던 '영생'보다는 지금 누리고 있는 재물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율법 교사는 부자 청년과 달리 영생에는 관심 없고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율법교사로서의 지위와 기득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장 관심을 받고 있는 예수를 누루고 율법으로 이겨서 자기의 입지를 더욱 높여 보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전공인 율법으로 시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자기가 원하는 율법에 대하여 예수께서 되물어 오자 아주 좋아 죽을 지경입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대답하고 만면에 미소를 흘립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율법 교사의 대답을 오늘날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떤 이들 가운데 아주 강력하게 밀어 부치는 것을 목격합니다. 율법이나 십일조나 십계명에 대하여 예수께서 강조한것을 폐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신약의 성도들에게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라는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데 어찌 율법을 폐하였다고 주장하는가에 대하여 말합니다. 율법의 정신이 신약에도 고스란히 전승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본문에서의 예수의 의도는 단지 계명을 아느냐? 그렇다면 그 계명을 지켜야 산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만 율법 교사가 워낙 율법을 잘 안다고 자긍하는 마음으로 감히 예수를 시험한 것에 대하여 보도한 것입니다. 한 율법사의 교만함과 주 예수의 겸손하심과 영생에 대한 이해 차이가 어떻게 다른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께서 율법 교사의 의도를 모르셔서 그렇게 대답한 것일까요?



보십시오.

율법교사의 앵무새와 같이 녹음기를 틀어논것 같은 모범 정답에 대하여 예수께서 뭐라 하시는가를 집중해서 살펴야 할 것입니다. 율법 교사의 대답에 대하여 예수는 이렇게 간단하게 말합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율법 교사를 인정해서 그랬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아니면 그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것이라는 뜻일가요?



반대로 율법 교사는 이렇게 이해를 한 것일 수 있습니다.



첫째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충분히 기본적으로 자기가 장담한다는 입장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목숨을 다하여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며 의무이며 당연한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며 선택받은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로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신자들 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기독교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자들 있습니까?



다만 그 기준이 하나님 보시기에 모자랄 뿐 다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있거나 착각하거나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예수 믿고 교회 열심으로 나가는 기독교인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다 구원받고 천국가며 영생은 따논 당상 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다만 구원은 확보 되었으니 이제 세상 사는 동안 이 땅에서도 복을 받아서 큰소리 치며 떵떵 거리며 사는것만이 유일한 소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을 받기 위하여 교회 충성하며 건축 멋지게 하며 봉사와 십일조와 주일 성수와 온갖 절기를 지켜 행하느라 바쁘게 열심들을 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내려 주셔서 사업도 잘 되고 건강하고 부자가 된다는 소원 때문에 열정적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그것을 마치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치고 봉사와 구제와 선교와 전도와 기도생활에 열심을 내지 않는자들이 있을까요? 다들 그렇게 하질 못해서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미안하고 송구스럽기에 그것을 조금이라도 무마하려는 갸륵한 마음을 충족시키려고 온갖 명목의 헌금 생활을 열심으로 기회가 있을 적마다 드려서 자기 마음의 평안과 안도감으로 위안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일부 몰지각한 사이비나 삯군 목사들 몇이 이러한 교인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자극하고 이용하고 유도하여서 스스로를 살찌우지만 모르는척 못 본척 지나쳐 버리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지요. 교회에서 행하는 헌금 생활이나 십일조가 어떻게 사용되어지거나 말거나 믿음으로 나는 하나님께 드렸으니 하나님은 이제 당연히 나에게 복을 주셔야 할 것이고, 그 돈을 챙긴 목사가 혹 있다면 따로 심판과 징계를 받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중적인 논리로 무장된 것입니다. 목사들이 십일조를 당당하게 강조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너희는 믿음을 헌금함으로 증명해 보이면 그만이지 않는가?" 라는 것을 세뇌시킨 다는 것입니다.



남이야 세습을 하던 부정을 하던 '너나 복받으면 되는 것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믿음으로 십일조 하고 믿음데로 될 것을 굳게 믿으라' 고만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남 신경쓰지 말고 너나 헌금 잘 바쳐서 축복 누리라는 것입니다. 모든것을 '믿음 으로' 하라는 것으로 정당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시험했던 율법 교사에게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고 간단하게 인정하셨으니 얼마나 기고 만장하였겠습니까?



진정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가 율법을 온전하게 지켰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자기보다 어수룩해보이고 낮은 신분의 사람 앞이라 해도 말입니다. 난 율법에 대하여 떳떳하다고 할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 교사가 바로 그렇게 교만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었고 중독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문화에 길들여지면 너나 할 것 없이 교만과 고집과 독선과 이기적으로 탐심을 품는 우상숭배로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만'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 리더가 되고 높임을 받는 자들이 가장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 "교만"의 자리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스스로는 아주 겸손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겸손으로 무장을 하여 자기의 교만함을 가리우느라 더욱 광명의 천사와 같이 열심을 품는 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속고 다른 이들도 속이는 것입니다. 분별하지 못하고 사람을 섬기고 사람에게 빠지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입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의 '옳도다 그리하면 살리라' 하신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서 한 술 더 떠버립니다. 오버를 한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차라리 이러한 질문을 하지나 말것을...

지면 관계상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다음에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루기로 하고 마칩니다.^^



2009/11/26.ⓒ 사랑그리고편지... http://letters.co1.kr/